1) 정세 특징 :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 도입
이 시기의 세계 경제는 미국, 일본, 그리고 독일 중심의 유럽연합(이하 ‘EU’와 혼용)으로 다극화 구조를 보였다. 1980년대에는 미국과 양강兩剛 구도를 구축했던 일본 경제는 플라자합의에 따른 대미 환율 하락과 부동산 거품 파열의 여진으로 1993~1997년에 1% 중반의 낮은 성장률을 보였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시아의 경제성장, 특히 중국의 고도 성장이 눈에 띄었다.
특히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만들었다. 체제 경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케인즈주의를 폐기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규제 완화, 민영화, 금융자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노골적으로 도입하였다. 자본의 세계화는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과 1995년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이하 'WTO') 체제의 출범으로 그 정점에 도달했다.
이는 개발도상국으로의 과도한 달러 투자와 금융자유화의 진전을 불러왔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긴축 시기에는 이들 국가에 투자했던 자금을 급격하게 회수함으로써 투기 세력에 취약한 개발도상국들은 이에 큰 타격을 입고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1982년에서 1985년간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를 강타한 외환위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외에도 1994년의 멕시코 외환위기, 1997년의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한국의 외환위기, 동구권의 외환위기,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등 지속적으로 외환위기를 야기했다.
이 시기 한국경제는 저성장,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경상수지는 지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지배는 더욱 강화되어 1996년 제조업 부가가치의 41.0%에 달하는 38.8조 원이 30대 재벌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실 대출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낳았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이하 ‘OECD’) 가입을 위한 자본 자유화와 금융자유화로 인해 단기외채의 비중이 급증하였으며 결국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를 맞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스스로를 ‘문민정부’라 칭하며 군부 내 비밀결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였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다.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제 실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등 3대 정치 개혁입법을 통해 선거제도를 개선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1997년 한보부도 사태에서 드러난 아들 김현철의 국정농단 사건과 대선 비자금 관리 문제로 지지율이 바닥을 쳤고,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총풍, 북풍 사건까지 일으켰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출범 초기 장기수 리인모 송환, 한완상 통일부총리 임명 등 대북유화 정책을 내세웠으나 이후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한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인해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자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는 등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회담이 무산된 이후에는 대북 조문을 거부하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
1990년대 들어 재계는 기존의 병영적 노동 통제 방식에서 신경영전략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통제 전략을 내세웠다. 신경영전략은 고용 유연화, 현장 조직의 다기능화, 팀제 도입 등 현장 장악력의 복원, 생산공정의 합리화, 능력주의 인사임금제도의 도입, 기업 문화의 혁신을 통한 협력적 노사관계의 복원 등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첫 노동부 장관이 된 이인제는 해고자 복직과 노동부 행정 지침을 대법원 판례에 맞추어 변경하겠다는 등 개혁적 방침을 밝혀 재계와 보수언론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1993년에 현대그룹 계열사 파업에 대한 온건한 대응으로 교체됐다. 김영삼 정부는 기존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및 총액임금제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과 혼용)의 임금인상 합의를 통한 자발적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도모했다. 1993년에서 1994년까지 시행된 한국노총-경총 임금인상 합의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고 실제 임금인상률은 한국노총-경총 임금 합의를 훨씬 뛰어넘었다.
1996년 들어 김영삼 정부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밝히며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와 혼용)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민주노총까지 포함한 노사정 간의 대화를 갖고 노동계의 노동기본권 보장과 재계의 노동시장 유연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귀결됐고, 결국 김영삼 정부와 민주노총은 정면 충돌의 길로 들어섰다.
2) 노개위 교섭과 1996~1997년의 노개투
김영삼 정부는 1996년 신노사관계 구상에 따라 민주노총까지 포함하는 사회적 대화 틀로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설치함에 따라 민주노총은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대화에 참가하게 되었다. 정부는 그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노조진영의 노동법 개정 요구와 OECD 가입에 따른 국제적 압력을 배경으로 민주노조진영을 제도적 틀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낡은 1987년 노동법체제를 바꾸어 노동계의 노동기본권 요구와 재계의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를 타협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노개위를 설치했다. 민주노총은 처음으로 사회적 대화 틀에 참여하면서 참여와 투쟁이라는 기조하에 대중투쟁을 기본으로 하고, 전술적 단위로 노개위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를 통해 처음으로 노동법에 대한 사회적 쟁점화에 성공했다. 노개위 내에서의 논의와 노사정 간의 입장 대립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일반 시민들도 복수노조 금지,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 등의 쟁점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조합원들에게 교육, 선전, 투쟁이 1년간 집중되면서 11월 이후 농성, 집회 등 대중투쟁이 점차 확산되었고, 이는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이하 ‘노개투’와 혼용)이라는 역사적 대투쟁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주노총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 여당이 단독으로 국회에서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마자 즉각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민주노총 출범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투쟁인 1996~19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이 시작됐다. 1단계는 12월 30일까지 즉각적 분노의 조직화 과정이었으며 민주금속, 자동차연맹, 현총련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이 중심 부대였다. 2단계는 1월 3일부터 단계적으로 파업을 재개하여 6일 사무직 노조가 결합하고, 7일 공공 부문도 파업에 돌입하여 14일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총파업 투쟁의 고양기였다. 3단계는 1월 15일부터 19일까지로 가장 많은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투쟁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한국노총과의 공동 전선이 전개되고 위력적 가두시위가 전국에서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이어졌다. 4단계는 1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로, 정부는 1월 21일 지도부 구속영장 철회 방침을 밝히고, 총파업 문제를 해결하고자 야당과 영수회담을 갖고 법 개정 논의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곧 법 개정 국면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에 한 번 이상 파업에 참가한 노조는 528개, 조합원은 40만 3,179명이었다. 총파업 투쟁으로 인해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으며 총파업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세계노동운동사에도 모범적인 투쟁이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민주노총 30년사〉
